[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윤현종 기자]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참 어렵습니다. 하던 일을 나름대로 잘 해왔고, 그래서 크게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다면 더 그렇죠. 다니던 직장을 과감히 관두고 다른 일을 선택하는 이에게 이유야 어찌됐든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중국 ‘억만장자 클럽’ 회원 중엔 직업을 바꿔 성공한 이들이 꽤 많습니다. 지난 30여년 간 중국 경제가 그만큼 빠르게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직업을 바꿔 소위 ‘잭팟’을 터뜨린 부호 가운데 두 명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겠습니다. 한 명은 대륙에서 재산이 가장 많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1년 새 재산을 세 배이상 불린 ‘특급부자’입니다.
▶철밥통 버린 30대, 민간기업가 변신=현재 자산규모 기준 중국 대륙 1위부호는 왕젠린(王健林ㆍ61) 완다(萬達)그룹 회장입니다. 그가 가진 순자산은 포브스 집계 기준 248억달러(한화 27조4480억원)입니다.

1954년 쓰촨(四川)성에서 태어난 그는 30대 중반까진 군인 신분이었습니다. 24세 때인 1978년부터 1년 간 동북지방의 다롄(大連)육군학원(일종의 사관학교)을 다녔습니다. 장교로 복무하던 1986년, 그는 랴오닝(遼寧)대학 경제관리학위를 취득합니다. 학교를 졸업한 왕젠린은 다시 육군관리학원 부처장이란 직책을 맡습니다.
사실 그는 이 일을 계속 했다면 신분과 급여가 보장된 ‘철밥통’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1년도 안돼 직업을 바꿉니다. 다롄의 한 부동산개발회사 관리를 맡게 된 것이죠. 인생의 첫번 째 변곡점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 사정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니던 시강(西崗)주택개발공사는 당시 국유기업이었는데요. 적자투성이였습니다.
2년 뒤인 1988년은 그에게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34세의 젊은 청년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으러 다니는 등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결국 그는 한 지역재개발사업을 따내 첫 수익을 올립니다. 왕젠린의 관리 하에서 회사는 적자를 탈출합니다. 이 해 왕젠린은 완다(萬達)그룹의 기초를 다집니다.

이후 1991년, 그는 중국정부의 국유기업 민영화계획을 적극 이용합니다. 당시 정부와 다롄시는 3개 기업을 지정해 민영화 시범사업을 추진중이었는데요. 왕젠린은 자신의 회사를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킵니다. 민영화 시범기업으로 체질전환을 시도한 것이죠.
이후 1992년 8월, 그는 회사 명패도 ‘시강주택개발공사’에서 ‘다롄완다부동산그룹’으로 바꿉니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완다그룹은 중국 최대의 종합그룹으로 변신했습니다. 2014년 기준 이 회사는 부동산, 호텔, 관광, 문화, 백화점 등 5대 산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백화점 75개, 쇼핑플라자 85개, 5성급 호텔 51개 등을 소유하고 있죠. 앞서 2012년엔 미국 대형 영화관 체인 AMC도 인수했습니다.

이런 끊임없는 다각화노력 덕분일까요. 최근 중국 부동산경기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지난해 12월 완다그룹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홍콩 주식시장에서 37억달러를 조달합니다. 홍콩증시 사상 최대규모였습니다.

▶특급부호의 전직은 식당주인, 회사원=직업을 바꿔 성공한 또 한명의 대륙부자는 전자상거래분야의 강자인 류창둥(劉强東ㆍ41) 징둥상청(京東商城ㆍJD닷컴)회장입니다. 2월 중국판 포브스 후룬(胡潤)연구소가 낸 데이터에 따르면 류 회장의 자산은 67억달러로 지난 1년 새 347%가 늘었습니다. 재산이 가장 크게 늘어난 부자입니다.
그의 자산은 지금도 늘고 있습니다. 포브스에 따르면 3월 현재 류 회장은 85억달러(9조4000억원)를 갖고 있습니다.

류창둥의 경력도 다소 독특합니다. 1974년 장쑤(江蘇)성에서 태어난 그는 베이징으로 유학, 명문대인 인민(人民)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합니다. 그러나 곧 전공에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대신 남는 시간을 쪼개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습에 몰두합니다. 배운 것을 살려 돈도 조금 벌었는데요. 이 종잣돈과 가족의 자금을 합쳐 한 식당에 투자합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빚만 떠안고 식당은 문을 닫게됩니다. ‘식당주인’의 첫 경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1996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회사원이 됩니다. 재팬라이프(Japan Life)라는 일본계 건강보조기구 업체였습니다. 거기서 류창둥은 창업 노하우를 익힙니다. 회사 순환보직제도를 십분 활용한 것이죠. 전산ㆍ경영관리ㆍ물류 업무 등을 두루거칩니다.
2년 뒤, 스물 넷 청년은 잘 나가던 외국계 회사를 관두고 2만위안(360만원)을 모아 사업을 시작합니다.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베이징 중관춘에 CD롬 등 전자제품 판매점 ‘징둥(京東)멀티미디어’를 세웁니다. 이는 현재 징둥상청의 전신이 됩니다. 인생의 첫 전환점인 셈이죠.

이후 2004년 1월, 류창둥의 판매점은 온라인 전용매장으로 전환합니다. 업체는 연평균 200%이상씩 몸집을 불립니다. 2006년엔 매출이 3배이상 늘었습니다. 1년 뒤엔 벤처캐피탈 회사 캐피탈투데이(Capital Today)의 쉬신(徐新ㆍ여ㆍ49)회장을 만나 투자금 1000만달러를 유치합니다. 쉬신은 이후 총 3000만달러의 투자금을 류창둥에게 건넵니다. 성공의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7년 뒤인 2014년 5월, 징둥상청은 미국 나스닥에서 성공적으로 기업공개(IPO)를 마칩니다. 시가총액 286억달러짜리 글로벌 기업이 됐습니다.

과거 실패를 겪고 절치부심했기 때문일까요. 류 회장의 행보는 거침이 없습니다. 3월 26일 그가 이끄는 징둥상청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전자상거래 관련 대규모 세미나를 열고 한국시장 진출을 본격화 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알리바바보다 경쟁력이 있다. 물류단계도 줄였다. 가짜상품은 엄격히 배제한다”. 그의 발언엔 자신감이 강하게 묻어났습니다.

직업을 바꿨다고 누구나 큰 돈을 버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둘은 전 직장에서 갖은 방법을 통해 새출발을 준비했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기회를 잡았습니다. 바다 건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습니다.
factism@heraldcorp.com

왕젠린 완다그룹회장(왼쪽)과 류창둥 징둥상청회장
그런데 중국 ‘억만장자 클럽’ 회원 중엔 직업을 바꿔 성공한 이들이 꽤 많습니다. 지난 30여년 간 중국 경제가 그만큼 빠르게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직업을 바꿔 소위 ‘잭팟’을 터뜨린 부호 가운데 두 명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겠습니다. 한 명은 대륙에서 재산이 가장 많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1년 새 재산을 세 배이상 불린 ‘특급부자’입니다.
▶철밥통 버린 30대, 민간기업가 변신=현재 자산규모 기준 중국 대륙 1위부호는 왕젠린(王健林ㆍ61) 완다(萬達)그룹 회장입니다. 그가 가진 순자산은 포브스 집계 기준 248억달러(한화 27조4480억원)입니다.

1970년대 왕젠린의 군복무 시절(출처=바이두백과)
1954년 쓰촨(四川)성에서 태어난 그는 30대 중반까진 군인 신분이었습니다. 24세 때인 1978년부터 1년 간 동북지방의 다롄(大連)육군학원(일종의 사관학교)을 다녔습니다. 장교로 복무하던 1986년, 그는 랴오닝(遼寧)대학 경제관리학위를 취득합니다. 학교를 졸업한 왕젠린은 다시 육군관리학원 부처장이란 직책을 맡습니다.
사실 그는 이 일을 계속 했다면 신분과 급여가 보장된 ‘철밥통’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1년도 안돼 직업을 바꿉니다. 다롄의 한 부동산개발회사 관리를 맡게 된 것이죠. 인생의 첫번 째 변곡점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 사정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니던 시강(西崗)주택개발공사는 당시 국유기업이었는데요. 적자투성이였습니다.
2년 뒤인 1988년은 그에게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34세의 젊은 청년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으러 다니는 등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결국 그는 한 지역재개발사업을 따내 첫 수익을 올립니다. 왕젠린의 관리 하에서 회사는 적자를 탈출합니다. 이 해 왕젠린은 완다(萬達)그룹의 기초를 다집니다.

1989년 완다그룹 창립당시의 왕젠린(출처=바이두백과)
이후 1991년, 그는 중국정부의 국유기업 민영화계획을 적극 이용합니다. 당시 정부와 다롄시는 3개 기업을 지정해 민영화 시범사업을 추진중이었는데요. 왕젠린은 자신의 회사를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킵니다. 민영화 시범기업으로 체질전환을 시도한 것이죠.
이후 1992년 8월, 그는 회사 명패도 ‘시강주택개발공사’에서 ‘다롄완다부동산그룹’으로 바꿉니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완다그룹은 중국 최대의 종합그룹으로 변신했습니다. 2014년 기준 이 회사는 부동산, 호텔, 관광, 문화, 백화점 등 5대 산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백화점 75개, 쇼핑플라자 85개, 5성급 호텔 51개 등을 소유하고 있죠. 앞서 2012년엔 미국 대형 영화관 체인 AMC도 인수했습니다.

게리 로페즈 AMC 최고경영자(왼쪽)와 왕젠린
이런 끊임없는 다각화노력 덕분일까요. 최근 중국 부동산경기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지난해 12월 완다그룹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홍콩 주식시장에서 37억달러를 조달합니다. 홍콩증시 사상 최대규모였습니다.

2014년 12월 중국 우한(武漢)의 완다무비파크 개관식 기념행사에 참석한 왕젠린(출처=게티이미지)
▶특급부호의 전직은 식당주인, 회사원=직업을 바꿔 성공한 또 한명의 대륙부자는 전자상거래분야의 강자인 류창둥(劉强東ㆍ41) 징둥상청(京東商城ㆍJD닷컴)회장입니다. 2월 중국판 포브스 후룬(胡潤)연구소가 낸 데이터에 따르면 류 회장의 자산은 67억달러로 지난 1년 새 347%가 늘었습니다. 재산이 가장 크게 늘어난 부자입니다.
그의 자산은 지금도 늘고 있습니다. 포브스에 따르면 3월 현재 류 회장은 85억달러(9조4000억원)를 갖고 있습니다.

류창둥의 어린시절(출처=바이두백과)
류창둥의 경력도 다소 독특합니다. 1974년 장쑤(江蘇)성에서 태어난 그는 베이징으로 유학, 명문대인 인민(人民)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합니다. 그러나 곧 전공에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대신 남는 시간을 쪼개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습에 몰두합니다. 배운 것을 살려 돈도 조금 벌었는데요. 이 종잣돈과 가족의 자금을 합쳐 한 식당에 투자합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빚만 떠안고 식당은 문을 닫게됩니다. ‘식당주인’의 첫 경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1996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회사원이 됩니다. 재팬라이프(Japan Life)라는 일본계 건강보조기구 업체였습니다. 거기서 류창둥은 창업 노하우를 익힙니다. 회사 순환보직제도를 십분 활용한 것이죠. 전산ㆍ경영관리ㆍ물류 업무 등을 두루거칩니다.
2년 뒤, 스물 넷 청년은 잘 나가던 외국계 회사를 관두고 2만위안(360만원)을 모아 사업을 시작합니다.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베이징 중관춘에 CD롬 등 전자제품 판매점 ‘징둥(京東)멀티미디어’를 세웁니다. 이는 현재 징둥상청의 전신이 됩니다. 인생의 첫 전환점인 셈이죠.

2007년 8월 류창둥 징둥상청 창업자(왼쪽)와 투데이캐피탈 쉬신 회장의 투자약정식 장면
이후 2004년 1월, 류창둥의 판매점은 온라인 전용매장으로 전환합니다. 업체는 연평균 200%이상씩 몸집을 불립니다. 2006년엔 매출이 3배이상 늘었습니다. 1년 뒤엔 벤처캐피탈 회사 캐피탈투데이(Capital Today)의 쉬신(徐新ㆍ여ㆍ49)회장을 만나 투자금 1000만달러를 유치합니다. 쉬신은 이후 총 3000만달러의 투자금을 류창둥에게 건넵니다. 성공의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7년 뒤인 2014년 5월, 징둥상청은 미국 나스닥에서 성공적으로 기업공개(IPO)를 마칩니다. 시가총액 286억달러짜리 글로벌 기업이 됐습니다.

2014년 5월, 미국 나스닥에 기업공개를 성공적으로 마친 류창둥 징둥상청 회장(출처=게티이미지)
과거 실패를 겪고 절치부심했기 때문일까요. 류 회장의 행보는 거침이 없습니다. 3월 26일 그가 이끄는 징둥상청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전자상거래 관련 대규모 세미나를 열고 한국시장 진출을 본격화 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알리바바보다 경쟁력이 있다. 물류단계도 줄였다. 가짜상품은 엄격히 배제한다”. 그의 발언엔 자신감이 강하게 묻어났습니다.

3월 26일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류창둥 회장
직업을 바꿨다고 누구나 큰 돈을 버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둘은 전 직장에서 갖은 방법을 통해 새출발을 준비했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기회를 잡았습니다. 바다 건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습니다.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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